그래도 겸재 정선은 그렸다. 경복궁의 폐허를…_카지노 호텔 리스보아에 가는 방법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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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 인왕산을 인왕산답게 그린 최초의 화가. '인왕산'을 '서울'로 바꿔도 좋겠죠. 서울을 서울답게 그린 최초의 화가. 겸재는 그런 화가였습니다.

얼마 전 미술사학자 최열이 쓴 《옛 그림으로 본 서울》(혜화1117, 2020)이란 책을 읽으면서 겸재가 얼마나 대단한 화가였는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조선 시대 한양의 모습은 겸재를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니, 겸재의 그림을 빼면 한양을 소재로 한 옛 그림의 역사가 대단히 빈약해지고 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겁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구석구석 그리도 많이 그려 남긴 화가는 겸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습니다. 책에 소개된 겸재의 그림만 자그마치 41점입니다. 왜 겸재, 겸재, 하는지 알 수 있겠더군요.

당연히 궁금증이 생깁니다. 서울을 그렇게 많이 그린 겸재가 설마 경복궁을 안 그렸을까?

[연관기사] 왜 조선 화가들은 경복궁을 안 그렸을까?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5379

이 기사에서 저는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근정전과 임진왜란 이후의 근정전 터를 보여주는 그림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경복궁 자체가 주인공이 된 경우가 조선 시대 그림에는 없다고. 다시 말해 조선의 화가들은 경복궁을 그리지 않았다고.

정선,〈경복궁〉, 비단에 엷은 채색, 16.7×18.1cm, 고려대학교박물관
겸재의 그림 <경복궁>입니다. 경복궁 근처에 살던 겸재가 오며 가며 본 풍경에 경복궁이 없었을 리가 없죠. 당시 경복궁은 폐허였습니다. 이 그림은 경복궁의 서쪽, 그러니까 지금의 옥인동 쪽에서 내려다본 풍경입니다. 제목이 없거나 아무 배경 지식 없이 봤다면 경복궁이라고 믿기 어렵죠.

화면 왼쪽 가운데 삐죽삐죽 서 있는 건 경회루의 돌기둥,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근정전 석축 기단의 흔적입니다. 그나마 나무 사이에 멀쩡한 건물이 보이죠. 궁궐 역사학자 홍순민 교수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입니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구인 영추문(迎秋門)은 돌로 막혔고, 인적 끊어진 경복궁 경내엔 소나무가 빽빽한 숲을 이뤘습니다. 참 쓸쓸한 정경이죠.

사대문 안 토박이인 작가 김훈은 산문집 《연필로 쓰다》(문학동네, 2019)에 실은 <귀향>이라는 글에서 경복궁에 얽힌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경복궁,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삼청동 숲과 한양도성 언저리는 내 고향의 중요한 놀이터였다. 경복궁은 담장이 허술해서 아무데로나 드나들었다. 경복궁 마당에서 나는 또래들과 닭싸움, 말타기, 자치기, 깡통차기를 하며 놀았다. (중략) 그때 경복궁은 일제 때 헐리고 전쟁 때 그을린 모습 그대로의 폐허였다. 전각이 있던 자리에 주춧돌만 남았고, 흩어진 석재 사이에 풀이 돋아나서 메뚜기들이 뛰었다. 남아 있는 전각의 아궁이 속은 어둡고 축축했다. 거기에 찬바람이 드나들었고 오래전에 식은 재 냄새가 났다."

1950, 60년대까지도 경복궁은 그랬습니다. 한양성곽이 무너진 자리에 널려 있었다던 베개만 한 크기의 돌들을 보며 어린 김훈은 "그 돌들이 너무나 작아서 나는 나라를 슬퍼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행복을 주는 것만 그려도 주어진 시간이 모자랄 판에 나라 백성을 기죽이고 쓸쓸함만 자아내는 폐허를 뭐에 쓰자고 그리겠어요. 번듯한 경복궁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도 겸재는 그렸습니다. 경복궁의 폐허를 그리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말이죠. 이 장면을 화폭에 옮기는 화가의 마음자리를 저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한평생 겸재가 본 경복궁은 변함없이 저런 모습이었다는 점이겠죠. 김훈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겸재의 화폭 속에서 무너진 것들은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고, 그 비극을 쓰다듬는 시간과 자연의 힘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명망 있는 작가의 표현은 역시 다르군요. 그런데 경복궁의 폐허를 보여주는 겸재의 그림은 이것 말고도 한 점 더 있습니다.

정선,〈은암동록〉, 종이에 채색, 31×29.8cm, 간송미술관
경복궁 뒤쪽 백악산 기슭에 있는 대은암(大隱岩)이라는 큰 바위를 중심으로 일대를 화폭에 담은 그림입니다. 화면 왼쪽 아래 네모난 바위가 보이죠. 이곳 역시 겸재가 집에서 오가며 숱하게 본 풍경이었을 겁니다. 멀리 산꼭대기에 보이는 나무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이고, 그 뒤로 저 멀리 관악산도 보이네요.

이제 시선을 가운데 담장으로 옮겨봅니다. 경복궁 북쪽 담장입니다. 자세히 보면 두 군데가 허물어져 있죠. 화가가 눈으로 본 그대로 그린 겁니다. 임진왜란 이후 15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경복궁 북쪽은 저런 모습이었습니다. 겸재가 그리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퇴락한 경복궁의 모습이죠. 수백 년 동안 경복궁의 주인은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들이었습니다.

천하도(한양도), 1822년,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지도를 보면 경복궁은 건물 없는 빈터로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1770년에 저술한 백과사전 《 환영지(寰瀛誌)》안에 들어 있는 여러 지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요 건물들을 그려 넣은 주변의 다른 궁궐과 달리 경복궁에는 건물이 안 보이죠. 그런 사실성마저도 지도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화성(畵聖)으로까지 불린 겸재의 예술 세계는 참 넓고도 깊습니다. 물론 겸재 그림의 예술성을 평가할 만한 능력이나 안목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겸재가 그림에 담은 장면 장면들이 지금에 와서야 얼마나 소중한지 매번 감탄하게 됩니다. 폐허였을 망정 겸재가 남긴 작은 그림 두 폭에서 경복궁의 한 시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