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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허스토리

“이겨야죠! 이겨야 할매들 분이 안 풀리겠습니까?”

'허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 소재는 '관부재판'. 공식 명칭으로는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이다. '관부재판'은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피해자 10명이 1992년부터 약 10년간 일본 시모노세키(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에, 양 도시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힘겨운 법정투쟁 끝에 1심에서 위안부 피해자 3명은 일부 승소,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은 패소했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유일하게 일부 승소 판결을 얻어냈지만, 1심 결과는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뒤집힌다. 그리고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원고측 패소, 즉 할머니들의 패소가 확정됐다.

영화는 할머니들의 소송을 이끌었던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의 헌신적 활동에 주목한다. 그러나, 실제론 김 이사장 못지 않게 할머니들의 마음을 쓰다듬으며 힘을 보탠 이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당시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이었던 이금주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2차 원고였던 고 이순덕 할머니와 3차 원고 양금덕 할머니를 관부재판에 합류시켰다.

이금주 할머니 역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다. 신혼시절인 1942년 강제징용된 남편은 태평양 전쟁 도중 남태평양의 외딴 섬 타라와섬에서 숨졌다. 이후 이 할머니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수많은 소송을 주도하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스스로 피해자이면서도 피해자들의 맏언니·대모 역할을 했던 이 할머니는 2012년 유족회 활동을 접은 뒤 현재 전남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아흔아홉번째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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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머니 곁에는 또다른 조력자들이 있었다. 20여년 넘게 생업마저 팽개치고 할머니 곁에서 유족회 활동을 도왔던 손녀딸 김보나(50살) 씨. 지금은 할머니 곁을 떠나 경기도 양평에서 생활하고 있다. 할머니의 희생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김 씨에게 '강제동원'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할머니의 말씀이 아직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듯.

"느그 할아버지 일이다. 니 할아버지 일을 니가 안하믄 누가 하겄냐"
"할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내 살아 생전에 못 갚으면, 이것을 해결 못하믄 내가 죽어서도 할아버지를 못 만나야"

김 씨를 만나 할머니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말미에 힘겹게 말문을 꺼내 물었다. 할머니의 병원비에 관한 것이었다. 김 씨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내죠. 할머니 앞으로 기초노령연금이랑 (저소득층) 주거비 지원이 나오는데, 얼마전에 주거비도 많이 깎였더라고요. 그걸로는 할머니 병원비를 다 낼 수 없어서 제가 번 걸로 내요.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달리 지원해주는 건 없는데..."

잊혀진 피해자들…연간 80만원 지원이 전부

"과거 대일항쟁기 조사위원회에서 강제동원피해자라고 신고한 게 22만 8천건이에요. 그런데 심사를 해 보니까 21만 8천건이 피해자라고 인정이 된 거죠"
- 행정안전부 관계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11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 들어 위원회 인원이 대폭 축소됐고, 박근혜 정부 들어 폐지됐다. 다른 일제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한 정부 내 위원회들도 이때 쇠락과 축소를 거듭했다.) 이 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 조사를 벌였다.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최초로 이뤄진 조사였다. 그 결과, 강제동원 피해자로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만 21만8639명에 달했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부는 2008년부터 강제동원 희생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다.

“피해자 21만 명 중 15만명 위로금 0원”

위로금은 사망자나 행방불명자는 1인당 2천만원, 부상자는 최저 300만원에서 최고 2천만원까지였다. 위로금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사망이나 행불 만9,337명, 부상 만6,574명에 불과하다. 이 위로금 말고도 일본 전범기업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주지 않은 임금 등 미수금에 대해 1엔당 2천원으로 환산해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피해자 21만여 명 가운데 15만명 가량이 정부로부터 단 한 푼의 위로금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생존자에게 정부는 더 인색했다. 2008년부터 생존자들에게 치료와 보조장구 구입을 위한 의료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1년 지원 금액은 80만원이 전부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월로 따지면 6만9,000원 꼴인데, 생존자에게 지원되는 건 그게 전부"라면서 "피해자들이 아흔을 훌쩍 넘겨 거의 다 병석에 누워계신 상황"이라고 전했다.

‘재판거래 5년’…숨진 피해자만 7천여명

그렇다면 현재 강제동원 생존자는 얼마나 될까? 올 2월 기준으로 의료지원금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5,245명이다. 생존자가 5,00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의료지원금 지급대상자 수는 매년 급감하고 있다. 2011년 만 7,148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5년 9,937명으로 만 명 선 아래로 줄었다. 이후 3년 만에 절반 가량이 줄어든 것이다. 양승태 사법부는 물론 청와대와 외교부 등 행정부와 사법부가 똘똘 뭉쳐 강제징용 손해배상 대법원 재판을 미루는 사이, 5년 동안 숨진 피해자만 7천여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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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꿴 첫 단추’…정부도 기업도 외면

1965년 6월 한일 정부는 '청구권 협정'을 체결한다. 이 협정을 토대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에 해당하는 일본의 역무를 10년 동안 한국에 지원하게 된다. 정부는 1974년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고 1975년 7월부터 2년 동안 민간 보상을 실시했다. 당시 이뤄진 보상은 보상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다. 실제 보상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오로지 사망자에 한했다. 1인당 30만원을 지급했는데, 이 돈을 받은 유족은 8,552명에 불과했다. 재산피해에 대해서도 1엔당 30원을 지급했는데 이를 모두 합친다 해도 일본이 무상 공여로 제공한 3억불의 5.4%에 불과하다.

그 많던 청구권 자금은 어디로 갔나?

나머지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소나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등 건설에 투입됐다. 전기는 물론 통신과 선로, 농수로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과 산업화 자금으로 쓰인 것이다. 역사적 부침을 거듭하며 기업 외형의 변화는 있으나, 현재 기준으로 이 청구권 자금을 사용한 기업은 모두 16곳에 이른다.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에 가장 많은 청구권 자금이 투입됐고 이어 포스코와 수자원공사, 중소기업은행(현 IBK기업은행) 등의 순이다.


복지 지원 없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설립됐다. 이 재단의 목적은 뭘까? 정관을 살펴보면, 일제 강제동원 피해 희생자와 유족 등에 대한 복지지원사업을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복지지원 사업은 전무하다. 추념사업과 학술조사연구 사업이 전부일 뿐이다.

이 재단 설립을 추진할 당시, 정부는 대규모 기금 마련을 계획했다. 정부가 2,000억원, 대표적 청구권 수혜기업인 포스코가 2,000억원의 기금을 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4,000억원의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는 물론 희생자의 배우자 등에게 복지지원 사업을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정부에서부터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당시 기획재정부가 2,0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정부가 출연한 사례는 없다"며 "매년 운영비 명목의 예산으로 20억원 내외를 배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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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마저 나서지 않는데, 기업들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정부의 요청에 그나마 포스코만이 응했다. 100억원을 출연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60억원의 기금을 출연했다. 이번달 나머지 40억원을 출연하게 되면 100억원을 모두 출연하게 된다. 다른 기업들은 어떻게 했을까?

2016년 9월, 행안부(당시 행정자치부) 주재로 재단 출연기금 조성을 위한 청구권자금 수혜 기업 연석회의가 열린다. 포스코를 포함해 16개 기업이 참석 대상이었으나,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과 KT는 불참했다. 당시 회의록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행안부는 기업들이 강제동원 희생자 보상금 등으로 성장한 만큼 사회적, 도덕적 차원에서 유족 지원 사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의 자발적 출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

'금융기관은 대체로 직접적 설비 투자 사업은 아니었고 허브역할을 하면서 사업주체이지만, 자금은 주로 지역 지자체나 해당지점에서 집행했기 때문에 공기업과는 성격이 다르고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출연을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짐. 금융기관에 대한 명확한 내역과 근거를 제시해주길 바람'
- 농협, 수협중앙회, IBK 기업은행(당시 회의록)

'설립 당시 차관으로 관리한 적 있으나 80년대 5.75%를 상환한 적이 있음. 이것이 청구권 자금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며 우리 회사는 100억원을 상환했기 때문에 상환한 것을 보면 무상자금은 아님"
- 한국도로공사(당시 회의록)

'공기업 특성을 고려해 정부에서 정확한 지침서를 만들어주면 이사회 설득시킬 명분이 있는데, 지침이 없으면 출연하기 어려운 구조임"
- 철도시설공단(당시 회의록)

이 회의는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한 채 마무리됐다. 이후 2차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을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열리지 못했다.

정의는 살아있는가?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할아버지들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이 제기된 후 13년 8개월 만이었다. 이를 두고 '지연된 정의의 승리'라는 말도 나온다. 재판엔 이겼지만 원고 4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일본 전범기업에게 1억원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일본 정부의 반발은 물론 이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해당 기업을 상대로 또다른 절차를 거쳐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정부, 우리 사회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남겨진 무거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