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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 혐오스러워 문화재 공부" 서울 중계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성낙주(54) 교사는 언젠가부터 석굴암 전도사처럼 통한다. 그런 그도 이젠 석굴암이 식상해 진 것일까? 그 자신의 10여 년에 걸친 석굴암 공부를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1999)이란 단행본으로 정리한 뒤 차츰 관심이 에밀레종으로 옮겨간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성덕대왕신종이라고도 일컫는 에밀레종에 대한 학술 논문 두어 편을 발표하면서 이에 대한 내공을 쌓더니 최근 그 성과를 또 하나의 단행본 '에밀레종의 비밀'(푸른역사)로 풀어냈다. 이런 그에게 "이젠 석굴암은 끝인가?"라고 물었더니 대뜸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나는 여전히 석굴암에 미쳐 있습니다. 석굴암에 대한 순수 학술 단행본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분량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석굴암 공부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작정입니다." 경기 남양주 출신으로 공고를 나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린자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실컷 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스물다섯살에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국어선생이 된" 그는 왜 석굴암이나 에밀레종 같은 우리 문화유산에 어떻게 빠져들게 되었을까? "대학교 1학년 때입니다. 정말로 듣기 싫은 교수님 전공 강의를 빼먹고 지금의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그날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 때까지 전 문화재엔 관심 없었어요. 전시실을 한 바퀴 휙 도는데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더군요. '원시토기실'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일본인 두 사람이 전시토기를 두고 열심히 토론을 벌이더군요. 제가 놀란 것은 1시간30분 뒤에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왔을 때도 그 두 사람이 계속 토론 중이더라 이겁니다." 이 때의 경험은 그 자신에게는 혐오감을 심어줬다고 기억한다.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내가 우리 문화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도대체 무엇인가? 저들(일본인들)은 우리 토기를 두고 1시간30분 이상이나 토론을 벌이는데 내가 그 토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박물관을 나서면서 결심했습니다. 적어도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몇 점만이라도 공부해 보리라. 그래서 그에 대해 남들이 물어오면 뭐라고 설명이라도 해 줄 수 있는 만큼은 공부하자.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첫 번째로 선택한 '공략' 대상이 석굴암이었으며, 그 다음이 에밀레종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소위 귀면와(鬼面瓦)라고 하는 한국 고대 기와와 경주 첨성대도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종묘(宗廟)도 공부하고 싶은데, 글쎄요, '빼먹을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른바 대학이나 대학원 전공이 미술사나 고고학, 혹은 역사학이 아닌 까닭에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이른바 '재야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석굴암에 관한 한 정통학계에서도 무시하지 못할만큼 탄탄한 분석력과 연구성과를 구축했다는 평가도 많다. 그의 석굴암 탐구는 어떤 면에서는 투쟁의 연속이었고 지금도 그런 측면이 많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석굴암을 둘러싼 수많은 통설 혹은 상식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석굴암이 구조에서 수학적인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오랜 학설은 "전혀 근거 없다"고 비판했는가 하면, 석굴암에는 원래 지붕이 없었으므로 지금의 덮개 시설은 없애야 한다는 주장 또한 그런 지붕시설을 갖춘 식민지시대에 촬영한 각종 석굴암 관련 사진자료 등을 증거로 들이대며 반박했다. 이처럼 통설에 대한 비판이 워낙 많으니 기존 학계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에밀레종'에서는 어떤 주장을 들고 나왔을까? 그 자신은 크게 두 가지를 내세운다. 첫째, 에밀레종 제작에 얽힌 설화를 신라 중대 왕실이 휘말린 권력투쟁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그 독특한 용머리와 용종 장식은 문무왕과 만파식적 설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간주한 점이 그것이라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종장(鐘匠)이 실패를 거듭하다 아이를 도가니에 넣음으로써 마침내 완성했다는 설화를 갖고있다. 그래서 이 종이 울릴 때마다 애처롭게 '에밀레~'라는 소리를 내고 이 때문에 에밀레종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이 유명한 설화를 지금까지는 자기 몸을 희생하는 불교정신의 발현으로 본다거나, 아니면 아예 설화 자체가 허구라고 보는 견해가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 올리는 종을 만드는 데 자기 아들을 희생시킨 행위가 어찌 불교적이란 말입니까? 나아가 이것이 최근에야 등장한 허구라면 19세기 외국인 선교사들이 채록한 한국민담에는 왜 나옵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성 교사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 놓는다. "에밀레종 전설은 무열왕계 신라 중대 왕실의 몰락이라는 궁중비극을 고발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 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이제는 무치(武治)가 아니라 예악(禮樂)을 중심으로 하는 문치(文治)를 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성 교사는 성덕대왕신종 명문(銘文)과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뜨거운 용광로에 던져진 어린아이는 결국 중대 신라기 권력다툼에서 어린 나이에 희생된 혜공왕이며, 제 아이를 제물로 바친 어미는 친정오빠인 김옹(金邕)과 더불어 당시 혜공왕을 쥐락펴락 하면서 섭정을 한 대비(大妃)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에밀레종 설화는 "이런 권력투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혜공왕을 동정하고 만월부인과 김옹이 한 패를 이룬 외척 세력을 비난하는 정치고발의 문학적 형상화인 셈"이라는 것이다. 에멜레종은 불교미술사, 그 중에서도 종(鐘)이라는 측면에서 그 머리에 대나무 모양 원통형인 용종을 안치하고 나아가 그것을 등에 진 용으로는 중국이나 일본 쌍룡도 아니며, 더더구나 네 다리가 아닌 두 다리만 배치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한국종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에밀레종 모티브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 교사는 동아시아의 종은 "신라종과 비(非)신라종 두 가지로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왜 이런 모티브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용종은 누가 봐도 대나무 마디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런 대나무를 용이 등에 지고서 힘차게 발길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 신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문무왕과 신라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주장은 이미 황수영 박사가 이미 선구를 개척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에밀레종은 "무작위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조형원리에 따라 치밀하게 기획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