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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주차인 3월 14일, 러시아 국영방송 채널1의 메인 뉴스 브레먀에서 방송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생방송 뉴스가 진행되던 도중, 스튜디오의 앵커 뒤로 한 여성이 갑자기 나타나 "전쟁 반대"를 수차례 외쳤습니다.

기습 반전 시위를 펼친 사람은 이 방송사의 프로듀서인 마리나 오브샤니코바였습니다. 전 세계 언론이 그녀의 기습 시위를 주목한 가운데, 그녀가 최고 15년 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보도가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러시아 당국은 그녀에게 3만 루블, 당시 35만 원 정도의 과태료만 부과했습니다. 과태료를 물린 이유도 방송에서 벌인 반전 시위가 아니라, 소셜 미디어에 (기습 시위의 이유를 담은) 반전 영상을 올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러시아 국내 반응 중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히는 오브샤니코바의 반전시위를 러시아 정부는 왜 처벌하지 않았을까요.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오브샤니코바는 러시아 당국의 조사 과정과 처벌받지 않은 이유를 직접 밝혔습니다.

■ "마크롱의 개입으로 형사처벌 피해"

기습 시위 직후 경찰에 체포된 뒤 이틀 만에 법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리나 오브샤니코바.기습 시위 직후 오브샤니코바는 경찰에 체포돼 방송국 건물 안에 있는 경찰서에 구금됐습니다. 이어 그녀는 모스크바 러시아 외곽 '전 러시아 박람회장'에 있는 비밀 경찰 사무실로 옮겨졌습니다.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그녀에게 수갑을 채우지도, 고문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빈틈없이 그녀를 감시했습니다. 구금된 14시간 동안 보안요원들은 교대로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30대로 보이는 조사관 두 명이 들어와 심문을 맡았습니다. 조사관은 평범했고 답변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조사관들이 누군가를 대신해 질문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심문하는 동안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기 속 상관이 조사관들에게 기습 시위에 대한 전 세계의 반응을 전하고, 그녀에게 적용할 혐의를 논의하는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그녀의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는 소식을 그녀는 그렇게 심문 도중에 들었습니다.

"상황이 끊임없이 바뀌었어요. 조사관은 "이게 행정 처분이 될까, 아냐 이건 범죄야, 우린 널 감옥에 집어넣을 거야."라고 얘기했어요." 오브샤니코바는 그러면서 조사관들이 자신의 반응을 살폈다고 회상했습니다.

끝없는 질문이 이어지고 꼭두새벽이 되자, 조사관은 그녀에게 차와 팬케이크를 권했습니다. 러시아 당국이 독극물을 넣은 홍차를 통해 반체제 인사를 제거한다는 의혹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녀는 차를 마셨습니다.

마리나 오브샤니코바의 기습 반전시위 다음날인 1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그녀의 신변 보호를 위해 외교적 노력을 시작했다는 입장을 발표하는 모습.조사관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그녀에게 대사관 보호나 망명을 허용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하겠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입장이 발표되면서부터였습니다. 조사관들의 전화가 다시 울렸고, 그녀에게 행정처분을 내리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최고 15년 형의 형사처벌이 아닌, 최고 10일간 구금할 수 있는 행정 처분이 적용됐습니다.

조사관들은 상사로부터 전화를 받고 그녀에게 추가 질문을 몇 개 더 하더니, 농담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마크롱이 당신에게 전화했군요, 뭔가 바뀌려나 봅니다."

오브샤니코바는 마크롱의 신속한 반응과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자신을 형사처벌로부터 구했을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 "러시아 당국, 진실성 의심하도록 허위소문 퍼트려"

러시아 당국의 이 같은 입장 변화에 대해 오브샤니코바는 "크렘린의 영리한 대응"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나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기 위해 거짓말 탐지기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크렘린은 꽤 영리해서, 내가 그걸 통과할 거라고 생각했고 더 좋은 전략을 찾았죠. 그들은 내 행동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어요. 내게 굴욕감을 주고 폄하하고 더럽히려고 했죠."

그녀는 러시아 당국이 자신을 '영국 스파이' 또는 '반역자'라고 지칭한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동시에 그녀가 FSB의 첩보원이라는 말도 퍼트렸다고도 했습니다. 반전시위에 크렘린이 관대한 처분을 하는 걸 보여줌으로써 반전 시위대 수천 명이 구금된 사실을 희석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이 그녀를 의심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파악하기 힘들도록 상황을 모호하게 만들어 공포를 확산시키는,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가 사용하는 선전 전략이 그녀의 반전시위에도 적용됐다는 겁니다.

"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양쪽에서 미움을 샀고 그건 꽤 유용했어요. 아마 그들은 지금쯤 신이 나서 손을 비비며, 자신들이 이 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 "나는 러시아인…러시아 떠나지 않을 것"

지난달 오브샤니코바는 독일 언론 디벨트의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채용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진행한 폴리티코와 함께 독일의 미디어 그룹 악셀 스프링거 소속 매체입니다

디벨트는 그녀를 채용한 사실을 발표하면서 "오브샤니코바는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의 상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서구 세계에 대해 알지만, 서구 시스템처럼 살기 위한 자유를 추구하면 무너져버리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더이상 그런 시스템의 일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녀를 채용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2003년부터 서구의 방송뉴스와 기자회견 등을 모니터하는 일로 언론인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로이터와 AP, BBC, 뉴욕타임스 같은 서구 매체를 접한 드문 경우였습니다. 오브샤니코바는 외신 데스크에서 일하면서,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서구언론의 보도와 자신이 속해있는 채널1 같은 러시아 매체의 보도 차이가 커지고, 러시아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와 서구 세계의 경계선에 있는 그녀의 고민은 기습 시위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시위 당시 러시아어와 함께 영어 문구를 손팻말에 적었습니다. "전쟁을 멈춰라, 정치 선전을 믿지 마라, 여기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러시아어 문구와 함께 맨 아래에는 "러시아인들은 전쟁에 반대한다."라는 영어 문구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어 문구는 외국인 시청자를 위해 의도한 것"이라면서 "모든 러시아인들이 어리석지 않고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를 떠난, 서구 문화에 익숙한 자국민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브샤니코바는 러시아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삶이 무척 많이 바뀌었지만, 이민 갈 생각은 없습니다. 현재 범죄 혐의로 인한 조사를 받는 것도 없고, 자유로운 상태예요. 저는 러시아의 시민입니다."